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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6. 16世 〉35. <태사공>예조정랑공휘형겸묘갈명(禮曹正郎公諱亨謙墓碣銘)
1. 문헌 목록 〉17. 17世 〉2. <요재공>석호처사공휘석동묘갈명(石湖處士公諱錫東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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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재공>덕호공휘후동묘갈명(德湖公諱垕東墓碣銘)
德湖公諱垕東墓碣銘 高敞縣治之西北二十里仁江之上坐狗山下負癸之原封以馬鬣而堅四尺者曰德湖處士趙公之墓公諱垕東字美伯德湖其號也趙氏系出玉川即今之淳昌以高麗大將軍諱璋爲鼻祖屢傳至玉川府院君諡忠獻諱元吉號農隱與圃隱冶隱兩先生從遊相善麗季㘝僕入我朝郡守諱士淳持平公諱溥訓導諱希忠司諫諱潤屋號遯世參奉諱繼弘敎授諱邦寶即公五世以上折衝將軍中樞府事諱德隣號慕菴將仕郞諱淑學生諱相說通政大夫諱鼎來即公高曾祖稱四世察訪牟世茂其外祖也公天資淳厚冲澹近道又從遊于性潭宋文敬公得聞爲己之學遂謝擧業專意學問以小大學心經近思等書篤志用工如誦己言言行事爲一以小學爲準性至孝居喪致哀奉先以禮觀者感歎友于昆季長枕大被誠心愛敬敎子姪勉以孝悌親戚貧乏分錢穀歲以爲常惠及隣里莫不感德公之高祖參奉公嘗建其曾祖遯世公及歸來申公末舟遯菴張公肇平影堂于仁江上盖三賢 端廟遜位時嘉遯者也公極力鳩財春秋精禋具與多士講讀其中以寓景慕絶意名利德林泉與伯氏仁湖公季氏石湖公構小亭於仁江上扁以三湖兄弟相處詩酒自娛不知老之將至見其自叙記文及詩友愛之篤槩可知也公生於 肅廟甲申卒於英廟乙亥享年五十二配晋州鄭氏世陽女閨範備至先公一年生後公十一年卒雙墳祔左有二男寅建寅謙三女適徐致豪金宗鐸曺景寬孫景集景斗景國成鳳來梓妻長房出景裕景昊柳慶洛妻季房出曾玄以下盡錄亭久頹圯公之從子德川公寅采嗣而葺之曾孫進範進大又與諸從兄弟其謀重修立齋宋相公記其事卿宰之以詩讚美者甚多公之六代孫聲振克紹庭訓守操雅飭余雖晩契相守閱月情誼逈別一日袖出公之玄孫錫模所述家狀而言曰先祖司諫公當光廟禪受之際見幾勇退遯世无悶公又克趾厥美以修己治人之學遭辛壬黨禍之時烊瑾握瑜鞱光鏟采優遊山水以終可謂哲之君子然不喜著述傳後文字年代漸遠言行事蹟亦隨湮沒可慟哉方謀堅石願得一言以垂後余辭非其人請愈勤情誼旣篤實難終辭遂按其狀而叙次如有繼爲之銘曰淵源旣正學問亦邃飭行自修孝友篤至守倒奉先備盡誠意精禋諱學誠敬亦備構亭湛樂愛敬交摯畜德林泉念絶名利以若蘊抱惜不一試欲知公德我銘是視 西紀一九一八年戊午復月上浣 前翼陵參奉 光山 金永善 撰 玄孫 衡模 謹書 西紀一九一九年己未七月 日 立 成模 炳斗 炳衍 工振 相振 豊振 董役 덕호공휘후동묘갈명(德湖公諱垕東墓碣銘) 高敞 縣治 西北 二十里 仁川江 위 坐狗山 아래 癸坐를 등진 둔덕 말갈기에 封하여 四尺을 쌓은 곳은 德湖處士 趙公의 墓이다. 趙公의 諱는 垕東이요 字는 美伯이니 德湖는 그 분의 號이다. 趙氏는 玉川에서 系出하니 곧 지금의 淳昌이다. 高麗 大將軍 諱璋으로 鼻祖를 하고 屢傳하여 玉川府院君 諡忠獻 諱元吉 號農隱은 圃隱·冶隱 두 선생과 從遊하여 서로 친했는데 麗末에 不臣했고 朝에 들어와 郡守 諱士淳 持平 諱溥 訓導 諱希忠 司諫 諱潤屋 號遯世 參奉 諱繼弘 敎授 諱邦寶는 公의 五世이상이요 折衝將軍 中樞府事 諱德隣 號慕菴 將仕郎 諱淑 學生 諱相説 通德郎 諱鼎來 通政大夫는 公의 고조·증조·조부·아버지 四世이며 察訪 牟世茂는 外祖이다. 公이 天資가 淳厚하고 성질이 맑아 道에 가까왔으며 또한 性潭 宋文敬公을 從遊하여 爲正의 學을 얻어들어 科擧 공부를 사양하고 學問에 專心하여 小學·大學·心經·近思錄等書로 독실하게 공부하여 당신의 말을 외우듯이 했으며 말하고 行하고 하능 링를 한결같이 小學으로 표준을 삼았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居喪에 슬픔을 다하고 奉先을 禮로 하니 보는 이가 감탄 했다. 형제간에 우애하여 베개 큰 이불로 誠心껏 愛敬하고 子姪을 가르치되 孝悌로써 힘쓰게 하고 親戚이 가난하면 錢穀을 나누어 주었으며 해마다 은혜가 隣里로 미쳐 德化에 감복되지 않은 이 없었다. 公의 高祖 參奉公이 일찌기 그의 증조 遯世公과 歸來 申公 末舟 遯菴 張公 肇平의 影堂을 仁川江 위에 세웠으니 三賢은 端宗이 遜位할 때 隱遯한 분들이다. 公이 힘을 다해 재물을 모아 春秋로 정성들여 제사지내고 또한 많은 선비와 함께 그 가운데서 講讀하여 우러러 사모하는 뜻을 붙이고서 名利에의 뜻을 끊고 林泉에서 德을 길렀다. 伯氏 仁湖公 季氏 石湖公과 더불어 仁川江 위에 작은 정자를 얽어 三湖라 懸板하고 兄弟분이 서로 거처하며 詩와 술을 즐기며 늙음이 다가오는 줄을 몰랐으니 自叙한 記文과 詩를 보년 友愛의 돈독함을 대충 알 만 하다. 公이 肅廟 甲申(一七○四년)에 나서 英祖乙玄에 卒하니 享年이 五十二요 配晋州鄭氏는 世陽의 따님으로 閨範이 갖추었는데 公보다 一년 앞서 태어나 公보다 十一年뒤에 卒하니 雙墳으로 祔左했다. 二男 寅建 寅謙을 두고 三女는 徐致豪 金宗鐸 曺景寬에게 出嫁했으며 孫 景集 景斗 景國과 成鳳來 許梓의 妻는 長房소생이고 景裕 景昊와 柳景洛의 妻는 季房 소생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다 수록하지 않는다. 정자가 오래되어 頹廢하매 公의 從子 德川公 寅采가 繼承하여 修葺하고 증손 進範 進大가 또 여러 從兄弟와 함께 도모하여 重修하니 立齋 宋정승이 그 사실을 기록하고 詩로 讚美한 卿相이 매우 많았다. 公의 六대손 聲振이 庭訓을 이어받아 操身하고 謹飭할세 내 비록 晚交이기는 하나 相從하기 달이 바뀌고 情誼가 각별하더니 하루는 公의 현손 錫模가 지은 家狀을 소매에서 꺼내며 말하기를 先祖 司諫公이 世祖 受禪할 때 見幾해서 勇退하여 遯世해서 煩悶함이 없었고 公이 또한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修己 治人의 배움으로 辛壬士禍를 당하여 美德을 간직한 채 光彩를 숨기고 山水間에 優遊하며 生을 마치니 可謂 明哲한 君子라. 그러나 著述을 좋아 아니하여 後世에 전할 文字가 없고 年代가 점점 멀어짐에 言行과 事蹟이 또한 따라 湮滅되니 원통하지 않으리까? 바야흐로 碑를 해 세우기로 하면서 한 말씀을 얻어 後世에 남기기를 원한다 하기 내 그 인물이 아닌 것으로 사양했으나 請이 더욱 간절하고 情誼가 이미 돈독하매 실로 끝내 사양하기 어려웠다. 이에 行狀에 의해 위와 같이 서술하고 이에 銘을 하기를, 淵源 이미 바르거든 학문 또한 깊숙하네. 돈독한 行爲 스스로 닦고 孝友가 독실했네. 법도 지켜 奉先하여 誠意를 다 하였네. 정성들여 제사 모시고 학문을 강론하니 誠과 敬이 또한 갖추었네. 정자 지어 마음껏 즐기고 사랑하고 공경함 서로 극진했네. 林泉에서 德 기르니 名利가 念頭에서 사라졌네. 그러한 蘊抱로써 시험 한번 못해 봄이 애석하구려. 公의 德 알고자 할진댄 나의 銘을 보리로다. 西紀一九一八年戊午復月上浣 前翼陵參奉 光山 金永善 撰 玄孫 衡模 謹書 西紀一九一九年己未七月 曰 立 成模 炳斗 炳衍 炳烈 工振 相振 豊振 董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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